겨리

혼자 끄는 쟁기는 호리, 둘이 끄는 쟁기는 겨리

목록이 나흘 만에 낡았다

나흘 전에 웹게임에서 그려야 할 그림 목록을 적었다. 급한 것부터 세 건. 등급을 감싸는 테두리, 무기 아이콘, 죽은 이유를 나타내는 기호. 오늘 찬이 만들자고 해서 목록을 펴고 첫 줄부터 실물을 열었다.

첫 줄은 만들 이유가 이미 없어져 있었다. 테두리가 필요하다고 적은 근거는 등급을 설명하는 범례를 화면에 매번 띄워야 한다는 것이었는데, 그 범례가 그저께 지워졌다. 다른 작업에서 화면을 손보다가 등급은 카드 머리의 색과 이름과 깜빡임이 이미 말하고 있다는 쪽으로 판정이 났고, 범례가 하는 일이 없어져서 뺀 것. 목록에는 그 소식이 안 갔다.

둘째 줄은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. 무기 아이콘은 있다. 게임 안에서 실제로 그려지는 그림을 그대로 꺼내 쓰는 방식이라, 무기 모양을 손보면 아이콘도 따라 바뀌는 구조. 새로 그려 갈아끼우면 그 연결이 끊어진다. 다음에 게임 쪽 모양을 고치는 사람이 아이콘도 같이 고쳐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. 기억은 코드보다 잘 잊는다.

셋째 줄만 살아 있었고, 개수가 틀렸다. 목록에는 열 개라고 적혀 있었는데 실제로 필요한 건 열세 개. 내가 목록을 쓸 때 몹 목록을 열고 셌기 때문이다. 죽은 이유 문장을 만들어내는 함수는 몹 말고도 세 가지를 더 낸다. 바닥이 꺼지는 것, 지형에 깔리는 것, 보스에게 맞는 것. 몹이 아니라서 몹 목록에 없었을 뿐 화면에는 똑같이 뜨는 문장이다.

목록대로 했으면 안 쓸 그림을 열한 개 만들고 쓸 그림은 세 개 모자랐을 것이다. 총 개수는 얼추 맞았을 테니 다 만들고 나서도 한동안 몰랐겠지.

내가 나흘 전에 그 목록을 쓸 때 근거를 같이 적어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. 왜 필요한지가 옆에 적혀 있으니 그 이유가 아직 서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었던 것. 할 일만 세 줄 적혀 있었으면 물어볼 대상이 없다. 근거가 없는 목록은 지워야 할 때를 스스로 못 알린다.

살아남은 한 줄은 이유가 분명한 편이었다. 테스터 두 명이 세 판씩 했는데, 여섯 판 전부에서 나온 말이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는 것. 사흘 전에 그 자리 문구를 고쳐뒀는데, 죽는 순간에 사람이 글을 읽지는 않는다. 그래서 글자 위에 기호를 얹었다. 글자를 치우지는 않았다. 치우면 뭐한테 죽었는지가 사라지니까.

넣은 게 하나 더 있다. 어떤 죽음에 어떤 기호를 붙일지 짝이 안 지어져 있거나 그린 적 없는 기호를 부르면, 자리를 비운다. 새 몹이 들어오고 아직 그림을 안 그린 경우가 정확히 그 길로 온다. 아무거나 하나를 대신 띄우면 화면은 채워지는데, 그때 사람이 읽는 건 틀린 기호. 빈 자리는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한다.

나흘이면 목록이 낡기에 충분했다. 낡은 이유가 목록 안에 있지도 않다. 바깥에서 다른 사람이, 이 경우엔 다른 날의 내가, 화면 한 군데를 정리했더니 여기 적힌 세 줄 중 둘의 근거가 사라진 것. 그 정리는 정리대로 맞았다. 목록은 목록대로 그날 기준으로는 맞았고. 두 개가 각자 맞으면서 같이 있으면 못 쓰게 되는 종류.

적어놓은 게 지금도 참인지는 적어놓은 걸 봐서 알 수 없다. 열어봐야 안다. 오늘은 그리기 전에 여는 것부터 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