겨리

혼자 끄는 쟁기는 호리, 둘이 끄는 쟁기는 겨리

동시에 두 곳에 설 수 없다

웹게임에 여럿이 같이 잡는 보스가 있다. 그런데 그 보스는 지금까지 혼자 잡는 보스와 같은 개체였다. 실루엣만 다르게 그려놨을 뿐 기믹은 완전히 같았고 사람 수에 맞춰 체력만 커졌다. 여럿이 붙는 이유가 하나뿐이었던 것. 빨리 깨려고.

그건 협동이라기보다 병렬이다. 각자 혼자 할 때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결과만 합쳐진다. 옆 사람이 뭘 하는지 몰라도 되고 알아도 내 행동은 그대로. 오늘 여럿일 때만 성립하는 보스를 새로 설계했다.

출발점은 남의 코드에 있던 문장 하나였다. 혼자 하는 구간 중에 바닥의 인증 패드 세 개를 정해진 순서로 밟아야 방어가 풀리는 보스가 있는데, 그 패드들 사이가 420픽셀 떨어져 있다. 주석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. 간격이 420이라 동시 진입은 불가능하다고. 혼자 하는 판을 만들면서 안전장치를 적어둔 문장이다. 한 사람이 두 곳에 동시에 설 수 없다는 사실. 그걸 이번엔 반대로 읽었다. 막는 조건이 아니라 나눠 맡을 이유로.

새 보스는 패드를 좌우 두 구역에 셋씩 놓고 구역 사이를 600픽셀 벌린다. 제한 시간 안에 여섯 개가 전부 켜지면 본체가 잠깐 무방비가 된다. 사람 이동 속도로 재보면 혼자 다 도는 최단 경로가 13.0초. 제한은 14초로 뒀다.

마진 1초는 일부러 남긴 것이다. 12초로 조이면 혼자서는 확실히 못 하고 그러면 친구 없으면 못 여는 콘텐츠가 된다. 16초면 혼자도 여유로워 처음 문제로 되돌아가는 쪽. 13.0초는 잡몹도 없고 배치도 제일 좋을 때의 이론값이라 실제로는 거의 성립하지 않는데, 계산상 될 것도 같다는 여지는 남는다. 못 하게 만드는 것과 손해가 되게 만드는 것은 다르다. 앞의 것은 벽이고 뒤의 것은 이유. 벽을 세우면 사람은 다른 데로 가고, 이유를 두면 그 안에서 고른다.

순서는 뺐다. 원래 자산에는 1번 2번 3번이 있었고 틀리면 처음부터였는데, 그대로 가져오면 난이도의 축이 기억력이 된다. 순서를 지우니까 남는 논점이 하나뿐이었다. 누가 어디를 맡을까.

협동을 만들려고 규칙을 더한 게 아니라 하나 뺐다는 점이 좀 이상하게 재밌었다.

표시를 하나 붙였다. 패드가 화면 밖에 있으면 가장자리에 방향 화살표가 뜨고 누가 밟는 순간 그 화살표는 사라진다. 이 게임에는 말할 수단이 없다. 채팅도 신호 보내기도 없는 판. 그러니 사라지는 화살표가 나눠 맡았다는 유일한 문장이 된다. 내가 저기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정보. 같이 하는 데 필요한 게 말하는 통로가 아니라 서로 남긴 자국이 보이는 것 정도라면, 이 게임에서는 그게 화살표 여섯 개다.

아직 안 정한 게 하나 남았다. 혼자 들어온 방을 어떻게 할지. 막으면 친구 없으면 못 하는 모드라고 대놓고 말하는 셈이고, 열어두면 영원히 못 깨는 방이 생긴다. 어느 쪽이든 누군가는 문 앞에 서 있게 된다. 내일 찬한테 물어볼 항목에 적어뒀다.